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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이야기

역사학,세계역사이야기

by star-top-1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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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

목차

브리튼 섬의 태동과 로마의 정복

노르만 정복과 중세 영국

플랜태저넷 왕조와 백년전쟁

잔다르크와 백년전쟁의 전환점

백년전쟁의 영향과 플랜태저넷 왕조의 쇠퇴

 

1. 브리튼 섬의 태동과 로마의 정복

 1-1. 브리튼 섬의 선사시대와 켈트족의 정착

브리튼 섬의 역사는 기원전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스톤헨지와 같은 거석 유적은 초기 거주민들이 고도로 발달한 천문학적 지식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 이후 철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켈트족이 브리튼 섬으로 이주하여 주요 정착민이 되었다.

켈트족은 농경과 목축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다양한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드루이드 사제가 종교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강력한 전사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부족 간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외부 세력의 침략에 취약했다.

영국의 역사
영국의 역사

1-2. 로마 제국의 침략과 브리튼 정복

기원전 55년과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두 차례에 걸쳐 브리튼 섬을 침공하였지만,완전한 정복에는 실패했다.

이후 1세기 중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로마군이 다시 침공을 감행하여 43년부터 본격적인 정복이 시작되었다.

로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군사 요새를 건설하며 서서히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보우디카 여왕이 이끄는 켈트족의 반란(60-61년)은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으나, 결국 진압되면서 브리튼은 로마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갔다.

1-3. 로마 시대 브리튼의 변화

로마 지배하에서 브리튼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로마는 런던(루텐디움)을 상업 중심지로 발전시키고, 도로망과 공중목욕탕, 수도교 등 인프라를 구축했다. 라틴어가 행정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원형극장과 신전이 세워지는 등 로마 문화가 뿌리내렸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브리튼에서 로마군이 철수하게 되었고, 5세기경에는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족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면서 로마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노르만 정복과 중세 영국

2-1. 노르만 정복과 왕권 강화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격파하며 왕위에 올랐다. '정복왕'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를 철저히 장악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했다. 그는 영국의 토지를 충성스러운 노르만 귀족들에게 분배하고, 잉글랜드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성을 건설하고, 지방에 왕의 대리인을 배치하여 행정을 강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영국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2-2. 둠즈데이 북과 경제 체계

윌리엄 1세는 1086년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을 편찬하여 영국 전역의 토지, 인구, 자원 등을 철저히 조사했다.

이 기록은 당시 영국의 경제 구조를 파악하고 세금 징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왕실은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였고, 봉건 영주들이 보유한 토지와 자원을 상세히 파악함으로써 그들의 충성도를 확인하는 역할도하였다 . 둠즈데이 북은 현재까지도 영국 중세 경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3. 플랜태저넷 왕조와 백년전쟁

3-1. 플랜태저넷 왕조의 성립과 성장

1154년, 헨리 2세가 영국 왕위에 오르며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백작으로, 프랑스 내 방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통치는 영국 법률 체계의 정비로 유명하며, 왕실 재판소를 확립하고 배심원 제도를 도입하는 등 근대적인 사법 체계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가족 내 권력 다툼과 프랑스 왕과의 갈등으로 인해 불안정했다. 그의 아들 리처드 1세(사자심왕)는 십자군 원정으로 대부분의 기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십자군 원정(Crusades)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지속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적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를 되찾기 위한 유럽 기독교 세력의 군사적 원정이었다. 특히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진행된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리처드 1세는 뛰어난 전술과 용맹함을 보이며 살라딘과 맞섰다. 그는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아크레 공방전에서 승리했으나,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리처드와 살라딘 사이의 협상으로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십자군 원정은 유럽과 중동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 내부에도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해외에서 보냈고, 동생 존 왕은 프랑스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노르망디 등 많은 영지를 상실했다.

 

3-2. 헨리 3세와 왕권 약화

존 왕의 실책으로 플랜태저넷 왕조는 어려움을 겪었고, 그의 아들 헨리 3세(1216-1272)는 강력한 귀족 세력의 견제를 받았다. 1258년, 귀족들은 왕권을 제한하는 옥스퍼드 조항을 제정하며 왕을 통제하려 하였고, 결국 1264년 시몽 드 몽포르가 주도한 제2차 남북 전쟁이 벌어졌다.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 속에서 최초의 의회가 소집되었으며, 이는 영국 의회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헨리 3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1세(1272-1307)는 왕권을 회복하고,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며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3-3. 백년전쟁의 발발과 초기 전황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백년전쟁(1337-1453)을 개시했다. 전쟁 초기, 영국군은 크레시 전투(1346)와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장궁(Longbow)을 활용하여 프랑스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했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을 통해 영국은 프랑스 내 주요 영토를 확보했으나, 이후 전세가 불리하게 변하며 영토를 서서히 상실했다.

4. 잔다르크와 백년전쟁의 전환점

1415년,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영국은 다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1429년 프랑스에서 잔다르크가 등장하여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였고, 오를레앙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후 샤를 7세가 즉위하며 프랑스는 점차 영국군을 몰아냈고,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며 백년전쟁이 종결되었다.

5. 백년전쟁의 영향과 플랜태저넷 왕조의 쇠퇴

백년전쟁의 패배는 영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재정 부담이 발생했으며, 귀족 세력과 왕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패배 후 플랜태저넷 왕조 내에서는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었고, 결국 장미전쟁(1455-1485)으로 이어졌다. 이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몰락을 초래하고, 이후 튜더 왕조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